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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여신도회 주일 설교문-김성희 목사

202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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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도회 주제강연 김성희목사 (독립문교회)

 

“살아계신 하나님 처음 사랑을 회복케 하소서”

느헤미야 8:1-12. 요한계시록 2:1-7 (시편 42:1-11, 마태복음 7:15-27)

 

1. 도입 – 가장 깊은 신앙의 병

사랑하는 여신도 여러분,

오늘 저는 한 문장으로 이 강의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아픈 줄 모른 것이 신앙의 가장 큰 병이다.”

이 말은 신학생 시절, 제 지도교수에게 들은 말입니다. 그때 저는 이 말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누군가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제 자신을 향한 정확한 진단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학교공부와 과다한 과제 등으로 제 안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고민하는 학생을 보아도, 힘들어 하는 이웃을 보아도, 슬픔도 분노도 아닌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저 먹먹함만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여러분, 분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무감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하고 싶지만, 반드시 마주해야할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아직도 마음이 설레입니까? 고통받는 이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까? 아니면 말씀을 들어도, 세상의 아픔을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상태는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수고만 남고 ‘처음 사랑’에 지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배를 버리지도 않았고, 교회를 쉽게 포기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오래 예배를 지켜왔고, 교회를 떠받쳐 왔고 말없이 감당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 처음 사랑을 회복케 하소서”

이 기도는 회개의 기도이기 전에 지친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사랑에 지쳤을 뿐입니다. 오늘 강연은 수고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 수고가 다시 기쁨으로 살아나길 바라는 초대입니다.

 

2. 요한계시록 – 에베소교회는 왜 책망을 받았는가?

요한 계시록은 공포의 예언서가 아닙니다. 박해받고, 지치고, 흔들리던 교회를 향한 목회적 편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열심있는 교회였습니다. 수고했고, 인내했고, 거짓 교훈을 분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4)

여기서 말하는 ‘처음 사랑’은 단순히 옛날의 뜨거운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 다. 신앙의 근원, 본질, 동기입니다. ‘처음’이라는 헬라어 프로토스(πρωτοζ)는 근 원적, 본질적, 결정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즉 행위는 있었지만, 생명력이 사라진 상태, 주님은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게으르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보신 것입니다. “너희는 여전히 일하고 있지만, 더 이상 사랑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구나”

 

3. 처음 사랑의 본질 –관계의 회복

“처음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은 열정을 다시 끌어 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헌신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의무를 늘린다고 회복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더 열심히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처음행위를 가지라”(2:5)고 하십니다.

그것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처음 사랑은 “왜 우리가 교회였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안에서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되었을 때,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받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 고 찬양했고, 함께 떡을 떼고 재산을 공유했고, 사람과 공동체를 치유하며, 그 사랑

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달라집니다. 얼굴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지고,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받은 사랑은 반드시 흘러갑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이웃 사랑은 공동체 책임으로, 공동체 책임은 창조세계 돌봄으로 확장됩니다.

요한계시록의 비전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 관계 전체의 회복입니다.

 

4. 사랑의 회복은 채움(행위)이 아니라 비움(성찰)에서 시작된다.

에베소 교회는 열심히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하느라 사랑의 자리를 놓쳤습니다.


예화1) 실로암 점자도서관


예화2) 중세 수도자의 기도


사랑은 더 많이 가지게 되고 내 바램이 이루어지면, 그 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더 세게 붙드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비우고 맡길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만납니다.

 

5. 느헤미야서: 성벽은 세웠으나, 사랑은 무너졌다.

1) 성벽재건이 아닌 공동체 회복 이야기

느헤미야서는 성벽재건의 책이 아닙니다. 공동체 신앙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성벽을 쌓는 중에 동안 약자들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가난한 동족이 땅을 빼앗기고, 빚 때문에 자녀가 노예로 팔립니다. 여인들이 외칩 니다.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 도다.”(느 5:5)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이 일이 옳지 않다.”

그리고 아직 성벽 문을 달기 전이었는데(6:1), 잠시 멈추고 다시 말씀 앞에 서게 합 니다. 그리고 ‘이자 받기를 그치라, 밭, 포도원, 집, 양식 일부를 돌려보내라’ (5:10-12)고 명령하고, 제사장들을 불러 맹세하게 합니다.(5:10-11)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백성들은 다 아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말대로 실천합니다.(5:13)

성경에서 회복이란 성과가 아니라 관계와 정의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

 

2) 말씀이 삶의 자리에서 다시 들릴 때, 사랑은 회복된다.

사랑하는 여신도여러분!

사랑은 결심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다시 사랑하자’고 말한다고 식어버린 마음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랑이 회복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느헤미야 시대는 철저히 무너진 시대였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예배가 끊어지고, 공동체가 흩어지고, 정체성이 흔들린 시대였습니다. 그 절망의 시대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벽도 다 쌓았고, 성문도 달았습니다. 그러나 성읍은 광대했으나 아직 백성들의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했습니다(7:4)

 

오늘 우리가 읽은 느헤미야 8장은 참 인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성벽재건이 끝난 되, 백성들은 먼저 잔치를 열거나 성취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 같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라” 고 요청합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이 지도자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 라 백성들의 자발적인 요청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살게 한 것이 무엇이 었는지, 우리가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 다시 듣고 싶습니다.” 이 갈망이 공동체를 광장으로 불러낸 것입니다.

에스라가 책을 펴니 백성들이 일어나고(8:5), 손을 들어 아멘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8:6)

더 나아가서 백성들은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는 것을 들으며 통곡합니다.(8:9)

왜 일까요? 느헤미야 8장에서 레위사람들이 한 일은 단순한 낭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깨닫게 하니”(8:8)

가난한 자의 빚, 노예로 팔려간 자녀, 침묵해야 했던 여인들의 부르짖음. 그 삶의 자리에 말씀이 닿았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깨어났습 니다. 사랑의 회복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말씀이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자기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을 때, 백성들을 울 었고 그 울음이 공동체를 살렸습니다. 사랑은 말씀을 많이 알 때 회복되는 것이 아 니라 말씀이 나의 삶을 해석해 줄 때 다시 살아납니다.

 

 

6. Z세대 여성들을 통해서 본 신앙의 진실

- 한국교회 트렌드의 통계로 본 Z세대 (19-29세 청년)


이 책은 매 해 발간되어 한해의 주요방향과 이슈가 될 내용들을 다룹니다.

2025년 한국교회 트랜드에 나오는 통계표 분석 자료입니다.

요즈음은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Z세대는 신앙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올린 표를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회자들은 청년들의 신앙생활의 1순위 를 ‘친교와 관계’(54.3%)로 봅니다. 그런데 Z세대 청년들은 신앙에 가장 도움이 되는 1순위를 ‘예배와 설교’(35.25)를 선택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이 말씀이 내 삶과 몸의 경험을 아는가?

 

 

7. 살아계신 하나님과 해석의 문제.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가, 지우는가?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이 있다.’(히 4:12)

그런데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왜 이 살아있는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상처가 되었을까요?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읽어 온 방식, 곧 해석의 문제입니다.

특히 여성들의 삶에서 성경은 종종 위로가 아니라 ‘참으라’는 명령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는 구절을 들어서, 성경에 어긋난다고 하 며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 지금도 있습니다. 과거에 예장 총회장은 설교 하면서 “여자가 기저귀 차고 어디 강단에 올라와 안돼‘라고 발언했다가 많은 비난 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성가대나 교사도 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요? 왜 전도사나 강도사(준목)까지는 되는데 목사는 될 수 없다는 것일까요? 잘못 된 성서해석의 적용문제입니다.

생명의 담지자인 여성을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지는 못할지언정 비하하는 사람들 이 여전히 있습니다. 최근 모 교단 총회장은 “우리교회 오는 여신도들은 화장안하 고 오면 혼낸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화장”이라고 발언해서 여성단체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자체보다 성경을 읽어온 방식, 곧 해석의 문제를 보게 됩니다. 하나 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해석이 특정한 성별, 특정한 권력, 특정한 경험 만을 기준으로 굳어질 때, 그 말씀은 누군가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도구가 됩니다.

Z세대 여성들은 말씀과 예배를 여전히 갈망하지만, 자신의 삶과 몸의 경험을 지 우는 해석에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교회를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발 교회가 상식적이고, 원칙대로 서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셨던 ‘처음 사랑을 제대로 말해 달라’는 신앙의 요청입니다.

 

 

8. 여성들을 지운 성경해석 -잊혀진 여성들

왜 성경은 여성을 지웠는가? 여기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경이 여성을 지운 것이 아닙니다. 여성을 교회에서 지우려는 것은 성경해석의 역사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여성들이 분명히 등장합니다. 지도자로, 예언자로, 후원자로, 해석자 로 등장합니다. 물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전부 남자이기에 많이 가려지고 숨겨 지고, 삭제되었습니다. 그나마 성경에 기록된 여성들도 번역에서 줄이고 오역하고, 설교에서 빼고, 신학에서 ‘예외’로 만들었습니다. 똑똑한 여성들, 지혜로운 여성들은 결국 기억에서 지워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만 지워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폭과 깊이 자체가 축소되었 습니다. 잘못된 해석은 닫힌 교회를 만들고 사랑을 메마르게 합니다.

 

1) 뵈뵈 (롬 16:1-2) –로마서 전달자가 아니라 공적지도자요 해설자

바울은 사람들을 소개할 대 뵈뵈를 가장 먼저 소개합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다아코노스‘(일꾼, 집사)인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 그를 주 안에서 합당하게 영접하고.... 이는 그가 나의 ’프로스타티스‘(보호자. 후

원자. 지도자)가 되었음이라‘ (롬 16:1-2)

‘디아코노스’를 바울 등과 같은 남성에게 쓰일 때는 ‘지도자’로 해석하지만, 여성은 ‘봉사자’로 해석합니다. 이 단어는 ‘공적 직분자’라는 의미로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대표자로 봐야 합니다.

바울은 뵈뵈를 ‘프로스타티스’라고도 부릅니다. 성경은 보호자로 해석했는데, 이 단어는 보호하고 후원하고 지도하는 총괄적인 의미에서 지도자라는 해석이 더 적합 합니다. 바울이 ‘추천한다’는 것도 단순한 소개가 아닌, ‘공식으로 위임한다’는 의미 입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서는 뵈뵈의 손에 의해 로마교회에 전달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편지 전달자는 낭독, 설명, 해석을 맡았습니다.

그렇다면 뵈뵈는 ‘봉사 많이 한 여집사’가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고 로마서를 전달 해석한 리더입니다. 우리는 로마서는 기억하면서 왜 뵈뵈는 잊었을까요? 성경에 없어서가 아니라 해석과 설교의 역사에서 축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의 회복은 지워진 이름들을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부르는 일입니다.

 

2) 유니아 (로마서 16:7)

‘유니아’는 ‘사도들 가운데 뛰어난 자’로 언급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여성 유니아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중세기에는 ‘유니아스’(남성형) 로 바꾸어 남성으로 왜곡시킵니다. 더 큰 왜곡은 ‘사도들 가운데(among)’를 ‘사도들 에게(by)’로 바꾸어 사도성을 지워 버리고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로 번역합니 다.(개역개정 성경) 그러나 현대인의 성경(kib)은 ‘사도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유니아는 바울과 함께 동역하며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초대 로 마교회 공동체에서 활동하던 뛰어난 사도입니다.

번역은 단순기술이 아니라 신학적 선택이 되곤 합니다. 여성을 지도자 자리에서 지우는 해석은 복음을 반쪽짜리로 만듭니다.

처음 사랑은 진리와 사랑을 함께 세우는 해석의 용기입니다.

 

 

3) 훌다 (왕하 22장)

요시야왕 시절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 책이 발견되었을 때, 왕. 대제사장, 서 기관들이 아닌 훌다를 찾아가서 해석을 요청합니다.

훌다는 제사장들도 해석하기 힘든 율법의 말씀을 해석했고, 그 해석 앞에서 요시 야 왕은 옷을 찢고 회개하고, 우상과 산당들을 헐고, 유월절을 다시 지키는 등의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 훌다의 해석이 공동체 개혁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시아왕은 기억하고 훌다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해석의 권위는 성별이 아니고 부르심에 있습니다. 처음 사랑의 회복은 말씀을 ‘살 리는 해석’으로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뵈뵈, 유니아, 훌다. 이 세 여인은 모두 훌륭한 지도자들로 성경 본문 안에 분명히 존재 하지만 번역, 주석, 설교의 역사 속에서 축소, 삭제, 왜곡되었습니다.

 

 

9. 기장교회와 여신도회

우리 기장은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교단입니다.

교리와 전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빛을 잃고, 교회가 교권과 이념에 예속 될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게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출발했습니 다. 기장의 출발은 조직이 아니라 신앙양심과 성경해석의 문제였습니다.

성경은 억압의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 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으로 ‘정의,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신앙의 부차적 관심이 아 닌 복음의 열매로 지향해 왔습니다. 처음 사랑은 이웃과 사회로 흘러가는 사랑입니 다. 생태, 기후, 약자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신앙의 책임입니다. 처음 사랑은 하나님. 의 세계를 다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회가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교회는 갱신한다 – 교리와 전통이 진리를 가두지 않도록

교회는 전진한다 – 어둠속에서도 말씀의 빛으로

교회는 생동한다 – 불의를 배척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 ‘우리는 듣는다, 새로운 말씀’ ‘우리는 배운다, 새로운 신학’ ‘우리는 만든다, 새 로운 역사’ ”

우리는 새로운 말씀, 새로운 신학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교회를 단지 ‘보존할 대상’이 아닌 ‘끊임없이 세로워질 공동체’로 노래합니다.

 

10. Z세대 여성들의 ‘개인적 발언’이 왜 중요한가?

최근 우리는 아주 중요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집회와 광장에서, 젊은 여성들이 발언대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발언은 기존의 거대한 담론 –민주주의, 인권, 국 가- 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일상, 취업과정의 차별, 데이트 폭력, 몸으로 겪은 공포와 수치 등이었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이렇게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그건 개인적인 이야기야”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습니다. 이 사사로운 이야기가 공적인 발언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성서적인 장면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개인의 몸에서 시작된 고통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갈의 울음, 한나의 통곡, 나봇의 포도원, 느헤미야 5장에서 외치는 여인들의 절규.

예수님의 복음도 길위, 식탁, 병든 사람들, 이름없는 여인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전해졌습니다.

Z세대 여성들은 단지 고상한 것, 화려한 것, 멋있는 것 장소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몸에서 일어난 일이 신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를 교회에 묻고 있습니다. Z세대는 예배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과 동떨어진 살아있지 않은 예배에 실망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의 말씀낭독,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에 대한 경고는 Z세대에게도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통합니다. 성문 밖의 그 폐허 위에서도 바른 말씀이 전해 질 때 백성들을 깨어났고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대로의 ‘바른 성서 해석’이 있는 그 자리에서 예배와 설교는 다시 살아납니다.

 

 

11. 결론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난다는 것

느헤미야 8장의 수문 앞 광장,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 오늘 Z세대 여성들이 삶으로 던지는 질문,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곳은 하나입니다. 삶과 분리되지 않는 신앙, 몸의 경험을 외면하지 않는 해석, 지워진 목소리를 다시 불러내는 복음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나를 살리는가? 이 말씀이 지금 여기서도 진리인가?”

이 질문은 기장이 처음 출발했을 때 던졌던 질문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신도 여러분,

처음 사랑은 더 많이 참는 것이 아닙니다. 더 조용히 버티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은 누구의 목소리를 다시 복음 안에 들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해석에서 지워졌던 여성들, 개인적이라며 밀려 났던 몸의 경험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뵈뵈, 유니아, 훌다는 성경 속에 없어서 잊힌 것이 아닙니다. 해석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잊혔습니다. 오늘 Z세대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지워버리는 신앙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세대의 질문은 우리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울입니다.


예화) 지성소를 찾은 사람

 

여러분,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의 하나님만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울고, 부딪히고,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다시 살아내는 그 자리, 그곳이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교회 안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을 하나님의 자리로 다시 읽어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기장교회 여신도회 여러분!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은 단지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초대입니다.

에베소교회에 주신 경고를 마음에 새기며, 느헤미야의 백성들처럼 말씀앞에 섭시다.

뵈뵈처럼 교회를 연결한 책임의 신앙, 유니아처럼 사도적 헌신을 감당한 용기. 훌다처럼 말씀을 해석할 줄 알았던 담대함, 그리고 오늘 Z세대 여성들이 말하는 몸의 경험, 일상의 진실이 말씀안에서 선포되게 합시다.

이 모든 것이 다시 복음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는 다시 살아납니다.

말씀이 다시 살아 움직일 때,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관계가 됩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기쁨의 공동체가 됩니다.

그 처음 사랑으로 다시 뜨거워지는 우리 기장교단의 자랑스러운 여신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